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문도 점령 사건 (문단 편집) == 경과 == 조선은 관련 당사국[* 러시아, 청, 일본, 조선] 중에서 가장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는 전신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청에서 정보가 건너오느라 직통으로도 6일 차이가 있었다. 양력 4월 28일 조선으로 전문이 갔지만, 조선이 전문을 받아본 때는 주 조선 영국 대사관의 '''직원''' 스콧이 전달한 양력 5월 16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파쇼다 사건]] 당시 프랑스군은 직접 본국의 의사를 물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려 그들과 대치 중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개전 여부를 영국이 [[이집트]]에 가설한 해저 전신망으로 런던에 연락한 뒤 [[런던]]에서 [[파리(프랑스)|파리]]에 해당 메시지를 전달하고 회신을 받아서 다시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본국의 명령을 받았다. 물론 프랑스 본국으로서는 횡단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영국 입장에서도 현지 프랑스군이 상부의 생각과 달리 엉뚱한 짓을 해서 일이 커지면 좋을게 없기 때문에 불확실성 제거를 위해 대치 중이라도 돕는게 나았다.] 조선은 뒤늦게 항의를 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거문도'라는 엄연한 명칭을 두고(혹은 의식조차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붙인 해밀턴(Hamilton), 즉 합미돈(哈米𥫱)이라는 명칭을 들이밀었으니 조선으로서는 상황 판단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것은 [[청나라]]였다. 영국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으려고 청의 조선 종주권을 지지한다는 유화적 제스쳐에 나섰으나, 청의 이홍장 역시 조선에게 '한번 조차시켜 주면 끝이 없다.'며 영국의 조차를 막으려 나섰다. >귀국의 [[제주도]]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문도]]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섬이라고 부릅니다.[* 합미돈(哈米𥫱)이 아니라 합미돈(哈米敦)라고 썼다.] 요즘 [[대영제국|영국]]과 [[러시아 제국|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阿富汗) 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토크]](海蔘葳)에 집결시키므로 [[영국인]]들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을 침략할까 봐 거마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섬은 조선의 영토에 속한 것으로서 영국 사신이 귀국과 토의하여 수군(水軍)을 주둔시킬 장소로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서 군함을 정박하였다가 예정된 날짜에 나간다면 혹시 참작해서 융통해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오랫동안 빌리고 돌아가지 않으면서 사거나 조차지(租借地)로 만들려고 한다면 단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이 남양(南洋)을 잠식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다가 뒤에 그만 빼앗아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거마도는 듣건대 황폐한 섬이라 하니, 귀국에서 혹시 그다지 아깝지 않은 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홍콩 지구 같은 것도 영국인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남방 종족 몇 집이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산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경영하여 중요한 진영(鎭營)이 되었고 남양의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섬은 동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웨이하이|위해]](威海)의 지부(之罘), 일본의 [[쓰시마 섬|대마도]](對馬島), 귀국의 [[부산광역시|부산]](釜山)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영국인들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어찌 그들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 >[[이토 히로부미]]는 이전에 나와의 담화에서 영국이 만약 오랫동안 거마도를 차지한다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귀국이 영국에 빌려준다면 반드시 [[일본인]]들의 추궁을 받을 것이며, 러시아도 곧 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지는 않더라도 역시 부근의 다른 섬을 꼭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귀국이 무슨 말로 반대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적을 안내하여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웃 나라에 대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며 더욱이 큰 실책으로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정세로 보아서도 큰 관계가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일정한 주견을 견지하여 그들의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정 제독(丁提督)에게 군함을 주어서 이 섬에 보내어 정형(情形)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귀 정부와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게 하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편 흥양(興陽)에 파견되어 갔던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목인덕穆麟德) 역시 영국의 수군 제독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나라 대군주(大君主)께서는 [[아시아|아세아]](亞細亞) 동부 해상에 주둔하고 있는 귀국의 병선이 우연히 우리 나라 거문도(巨文島)에 이르렀다는 소식과 아울러 귀 [[제독]]이 해도(해당 섬, 該島)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대군주께서는 중국의 제독 군문(軍門) 정여창(丁汝昌)이 2척의 군함을 가지고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나라 대군주께서는 군문 정여창에게 우리 나라에 특파한 관원들을 데리고 섬에 가서 정형(情形)을 조사하여 보라고 특별히 청하였습니다. > >우리들은 해도에 당도하여 즉시 귀국의 병함(兵艦) 6척과 상선 2척이 해도 안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해도의 높은 산꼭대기에 귀국의 깃발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관들이 곧 귀국의 비어선(飛魚船)에 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선주(船主)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귀 제독의 명령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귀 제독이 현재 일본 [[나가사키|장기도]](長崎島)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관들은 다시 군문 정여창과 가부를 토의하고 장기도에 가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임금의 윤허를 받아 이달 5일 아침에 장기도에 도착하였고, 본관들은 그 즉시로 귀 제독을 면회하였습니다. 면담한 여러 가지 건은 다 주상의 명령을 받은 것이므로 귀 제독의 대답을 청합니다. 이미 우의(友誼)를 맺은 나라인데 벗이 된 나라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명령에서 나왔으며,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 >본관들은 귀 제독이 즉시 처리하여 조약 관계가 있는 각 나라들로 하여금 해도가 본국의 땅이라는 것을 모두 알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살펴보고 회답해 주기 바랍니다. 5월 조선의 사신이 [[거문도]]에 도착했을 때, 영국 해군은 외교 교섭과는 별도로 거문도 기항(임차) 대가 연간 5천 파운드를 지급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 측으로부터 명분 상 조선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거문도 기항을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조선은 일단 영토 점령(임차) 자체가 부당한 일이므로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조선의 항의에 동의하였으며, 독일은 영국의 자유당 정부와의 관계가 안 좋았지만 당시 영사였던 젬브쉬는 본국 훈령과 함께 개인적인 동정시선을 보냈다. 미국은 조선을 이해하는 동시에 러시아와의 예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극동]]에서 영-러의 긴장이 고조되자 부담을 느낀 것은 청이었다.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을 내심 지지했지만, 청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을 드는 것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서서, 러시아의 남하는 없을 것이며 러시아와 조선의 밀약도 헛소문이라고 확인시켜줘서 영국을 안심시키려 했다. 영국은 조선 측이 보낸 속국 인정 전문을 받아들여, 청을 통해 러시아에게 조선을 점령하지 않을 것과 조선의 현상 유지를 요구했다. 한편 청은 러시아에게 영국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하며 [[두만강]] 하류, 즉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 끄트머리의 영유권을 회복하려고 들었고,[* 이때 훈춘에 8만 대군으로 무력 시위를 했으나 러시아는 씹었다.] 그 덤으로 자그만치 '청한 종속 관계'를 러시아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무시했다. 이렇게 청이 두 열강 사이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사이 거문도 점령은 1886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은 그해 7월에 러시아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했으며,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하려는 건의까지 올린 상황이었다. 청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조선이 [[속국]]이므로 외교권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회답하는 나라는 없었지만 거꾸로 이를 반대하는 나라도 없었다. 영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동북아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서구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거문도는 흡사 세계 각국의 군함 전시장처럼 변했다고 한다. 결국 1886년 12월에야 협상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조선을 보호국화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나, 청과 영국 역시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확인했다. 2년의 점령 끝에,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얻고, 동시에 [[거문도]]가 생각보다 요새화하기 어려워서 이를 시행하려면 꽤나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랬기에 청의 중재를 담보로 합의 3개월, 점령 22개월만인 1887년 [[2월 5일]] 거문도를 말그대로 도로 뱉어내고 철수했다. 또한 점령 시작 때처럼,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의 철수 소식을 가장 늦게 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